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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핵을 만든 인간의 공포와 광기를 고뇌했다

냉전 이후 사라지는 듯했던 핵무기 공포가 최근 다시 살아나고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황이 불리할 때면 핵무기 사용을 언급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대선거 기간인 지난 3월에도 “핵무기는 항상 전투 준비 태세에 있다”고 공개적으로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한반도에서도 핵 위협은 더 커졌다. 지난 1월 로버트 갈루치 조지타운대 명예교수는 외교안보 전문지 ‘내셔널 인터레스트’ 기고문에서 “2024년 동북아시아에서 핵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최소한 염두에는 둬야 한다”고 밝혔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선될 경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후보로 거론되는 엘브리지 콜비 전 국방부 전략·전력 개발 담당 부차관보는 지난 6일 “한국의 핵 무장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발언까지 했다.   이런 현실을 반영하듯 핵무기를 둘러싼 고뇌는 다시 대작 영화의 소재가 됐다. 2023년을 지배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오펜하이머’는 작품상을 포함해 아카데미상 7개 부문을 휩쓸었다. 대작으로 유명한 드니 빌뇌브 감독(듄·블레이드 러너 2049)도 핵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 제작에 들어갔다. 원작인 애니 제이콥슨의 소설 ‘Nuclear War: A Scenario’의 내용상 ‘오펜하이머’를 이을 영화로 꼽힌다.     영화에서 핵무기는 인류의 종말을 의미했다. 핵전쟁이 당장 일어나지 않더라도 그 존재만으로도 문명과 생태계의 파괴자였다. 핵이 불러올 수 있는 종말은 그 자체로 공포였고 영화는 핵무기의 탄생과 함께 핵의 공포와 부조리를 고민했다.   ‘오펜하이머’가 발표되기 60년 전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핵을 주제로 한 ‘닥터 스트레인지러브(Dr. Strangelove or: How I Learned to Stop Worrying and Love the Bomb)’를 발표했다. 허무주의, 절망, 광기에 대한 큐브릭의 심화된 고찰이었으며 전쟁과 정치가들의 정쟁을 조롱한 당대 최고의 핵전쟁 영화였다.     핵무기 위협이 재부상한 지금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와 함께 다시 한번 상기해볼 만한 영화 2편이 있다.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와 함께 1964년에 발표된 ‘페일 세이프(Fail Safe)’, 그리고 1965년 발표된 ‘베드포드 사건(the Bedford Incident)’이다. 두 편 모두 냉전 시대가 낳은 영화들로 영화사에 등장한 핵 관련 영화 중 보석 같은 작품들이다.     ▶‘페일 세이프’의 경고   1962년 출판된 유진 버딕의 베스트셀러 ‘페일 세이프(한국 개봉명 ‘핵전략 사령부’)’는 1964년 시드니 루멧 감독에 의해 영화화된다. 월터 매튜, 헨리 폰다가 주연한 이 영화는 1960년대 초 미국과 소련 간의 냉전을 배경으로 한다. 버튼 하나로 도시 하나를 파멸시킬 수 있는 핵무기의 위력과 급박해진 핵전쟁 위협을 실감케 하는 영화였다.     모스크바에 핵폭탄을 떨어뜨리기 위해 죽음의 비행을 하는 미 공군 폭격기 편대에 본부로 귀환하라는 명령이 떨어지지만 시스템 오작동으로 모스크바를 공격하라는 명령으로 잘못 전달된다. 훈련된 조종사들은 암호화된 명령만을 믿고 모스크바 상공에 도달한다.     미 대통령(헨리 폰다)은 미소 간의 전면전을 막기 위해 최후의 카드를 꺼낸다. 그것은 바로 소련과 협조하여 모스크바 상공의 미 폭격기를 추락시키라는 명령이다. 적을 도와 동료를 추락시켜야 하는 공군은 거역할 수 없는 명령과 동료애 사이에서 고뇌한다. 자신들을 격추하려는 아군의 공격을 피해 모스크바로 돌진하는 폭격기 편대의 운명은 어찌 될 것인가.     냉전 종식 이후에도 핵 위협은 사라진 적이 없다. 2000년 조지 클루니는 ‘페일 세이프’를 CBS 화면을 통해 ‘생방송 연극’으로 재연한다. 35년 전 핵 앞에 무력한 인간들의 모습을 그려냈던 영화의 엄중한 메시지를, 1950년대와 1960년대 황금시대를 누렸던 TV 라이브 드라마 ‘플레이하우스 90’의 형식을 빌려 30년 만에 생방송 영화를 흑백으로 재연해 냈다.     영국 출신의 스티븐 프리어스가 연출을 맡았고 조지 클루니, 리처드 드라이퍼스, 하비 카이텔 등이 출연했다. 월터 크롱카이트가 작품의 배경을 소개하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이 연극은 NG를 허용할 수 없는 생방송이라는 점 때문에 오랜 기간의 리허설을 걸쳐 촬영에 들어갔다.     ▶‘베드포드 사건’의 광기   ‘베드포드 사건’은 1965년 영미 합작으로 제작됐다. 스탠리 큐브릭의 초기작에서 제작자로 활동하던 제임스 B. 해리스의 첫 번째 연출작이었다. 미 해군 구축함 베드포드가 그린랜드 연안에서 소련 잠수함을 발견한다. 기자 벤 먼스포드(시드니 포이티에)와 나토 해군 고문으로 2차 세계 대전 당시 U보트 함장을 지낸 볼프강 슈렉 준장(에릭 포트만)이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함장 에릭 핀랜더(리차드 위드마크)는 사령부의 명령을 무시한 채 소련 잠수함을 사냥감으로 삼아 무자비한 공격을 감행한다. 이 과정에서 소련 잠수함이 핵 어뢰를 발사한다. 결국 함장의 고집은 베드포드호를 엄청난 위기에 빠트린다.     해리스 감독은 원작 소설과 달리 잠수함이 등장하지 않는 ‘잠수함 영화’로 개작했다. 전쟁의 물리적 액션보다는 마지막 파국까지 몰고 가는 심리적 압박감을 표현하는 데 집중했다. 핀랜더의 집착은, 지옥까지 쫓아가서라도 고래를 잡겠다는 ‘모비 딕’의 에이허브 선장을 연상시켰다. 그는 고래 대신 소련 잠수함을 쫓는다. 이 때문에 원작은 실제로 ‘모비 딕’의 표절작이라는 오명에 시달렸다.     영화가 만들어졌던 1960년대엔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핵과 3차 세계대전에 대한 공포감을 공유하고 있던 시대였다. 영화는 자국의 이익만을 위한 정치가의 애국심이 진정 인류 평화를 위한 마음이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폴아웃’ 핵전쟁 그 이후   현재 아마존 프라임을 통해 스트리밍되고 있는 TV 드라마 ‘폴아웃(Fallout)’은 핵이 지구를 뒤덮은 미래의 참혹상을 ‘미리’ 경험하게 한다. 2077년 세계대전을 치른 인류가 200년 후인 2296년에 맞게 되는 핵전쟁의 여파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다.       핵은 어느덧 인류를 종말로 몰아넣었다. LA는 황무지로 변해 있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세상, 국가는 사라지고 ‘볼트(Vaults)’라는 생존 지향 집단들이 황무지의 권력 지형을 이루며 서로 투쟁한다. 종말이 가까운 시기에 벌어지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자원 전쟁 … . 과거는 차라리 신비하다. 그들의 과거는 우리의 오늘이다. 200년의 간극, 이제나 그제나 핵은 늘 우리 곁에 있다. 도덕, 인본주의조차 사치가 되어버린 세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루시 매클레인은 자신의 2세들이 미국을 재건할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다. 핵이 없는 세상, 과연 인류에게 가능한 희망일까. 김정 영화평론가 [email protected]공포 영화 핵무기 공포 영화 제작 대작 영화

2024-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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